※ 영성일기 ※

기독영화아카데미/한국영화사 +2

한국영화사

1980년대 (1980~1989)


1. 개요

1980년대의 한국 영화는 또 한번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환기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의 하나다. 그 중요한 개혁의 골자는 70년대 영화에 대한 정책적 통제에서 80년대의 개장정책으로의 전환에 의한 영화제작의 자유화라고 할 수 있으며 커다란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1979년에 제 4공화국의 막이 내리고 1980년에는 제 5공화국이 출범하였으며 이것은 곧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전환, 즉 통제적인 폐쇄사회로부터 폭넓은 개방적인 민주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양시대 사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그 변혁은 현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폐쇄로부터 개방으로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영화 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몰고 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영화법의 개정이었다. 지난 70년대에 줄곧 정부가 연례의 영화시책에서 주장했던 유신이념의 구현이라는 특정한 정책명령이 사라지고 ‘영화 예술의 향상’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영화 검열에 있어서 크게 완화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서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70년대 영화와는 그 미학적 특징을 현저하게 달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의 원인이 되는 것을 70년대의 폐쇄적인 영화 환경이 80년대의 보다 개방적인 영화 환경으로 전환한데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영화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주어지는 소재로서의 개방과 성장의 사회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의 요인으로서의 영화정책이 지양되므로서 80년대 영화의 몇가지 특징을 볼 수 있게 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한국 영화는 본래의 작가적인 눈으로 정직하게 생생한 소재를 선택하고 표현의 영역을 넓혀 한국영화가 소생할 가능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리얼리즘의 회복과 진지한 작품의 제작을 그 주조로 하게 된데서 깊은 뜻을 갖게 한다. 한편 매우 실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점도 80년대 영화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은 70년대에 그 작가 의욕이 억제되었던 일견의 중견 감독들과 80년대에 데뷔한 신인감독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의 진지한 눈으로 한국사회의 현실이 안고 있는 가난한 서민층의 생활이나 억압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인간 생활의 모순과 비참함을 그려냈다. 물론 80년대의 사회 현실은 5-60년대의 처참한 전후 현실과는 다르다. 한국인의 GNP가 불과 100달러였던 1950년대에서 2000달러가 넘게 죈 거대한 산업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괄목할 만큼 달라진 사회적 변화,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오락 영화는 다시 멜로드라마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대잠한 에로티시즘이 그 주조가 되었다. 이것도 역시 영화 검열이 완화되면서 나타난 경향이다. 70년대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농도 짙은 섹스 장면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 80년대의 영화 장르는 사극 영화와 종교영화의 새로운 대두가 주목되었다. 한편 활극과 희극 영화들이 잠시 살아났다가 쇠퇴했으며 70년대까지 정책적인 장르였던 군사영화, 반공영화,계몽영화 등은 거의 눈에 띄지않게 되었다.

2. 새로운 영화 미학의 시도들

먼저 50년대에 데뷔한 거장 유현목이 만든 <사람의 아들(1980)>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민요섭이라는 한 이단적인 신학생의 사회참여의 신념과 행동을 심각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이 믿어왔던 이단적인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결국 그의 광신적인 추종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사회참여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70년대에 있어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주제다. 유현목은 70년대 오랜 슬럼프에 빠져있다가 <사람의 아들>에서 또한번 그의 독특하고 강렬한 사실적인 영상미학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60년대 주요한 활동을 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는 <짝코(1980)><안개마을(1982)><불의 딸(1983)><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길소뜸(1985)><씨받이(1986)><티켓(1986)> 등이 있고 그의 작품은 현실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 그것을 완벽한 영상으로 표현하는 오소독스한 연출을 찾아볼 수 있다. 임권택의 작품 속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만다라><길소뜸>이 있다. <만다라>는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에 올라크게 평가되었고 이어서 세계각국의 영화제에 초청되어 한국영화의 수준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길소뜸> 역시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에 올라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던 작품으로 6.25동란으로 헤어지게 된 남녀가 휴전 후 30년이 지나 아들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극적 감정을 전혀 배제한 카메라의 객관적 응시를 통해서 시간적인 매몰 속에 묻힌 분단 민족의 전쟁과 찢겨진 남녀의 애정, 그리고 끝내 친자 확인을 거부하는 인간의 변화에 깊은 비판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그렸다. <길소뜸>은 또한 시카고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정진우가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63년 <외아들>로 였다. 25세에 감독이 된 그는 60년대의 청춘영화의 기수로 젊은 세대들의 욕구불만과 센티멘탈리즘을 담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그의 1982년작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는 도시의 가난한 처녀가 돈에 팔려 어느 낙도에 작부로 가는 데서 시작한다. 낙도로 팔려간 작부는 뱃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며 생선 한마리 값에 몸을 팔아야한다. 그녀는 한 선원과 사랑을 하게 되면서 섬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정진우는 남해 낙도에 로케이션을 감행해 자유를 갈망하는 한 여인의 처참한 생존 싸움을 고발적으로 묘사했다. 조직적인 폭력배의 그물 속에서 이처럼 생존의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치열하게 묘사한 작품은 보기 힘들었다.
70년대 데뷔한 이두용과 이장호는 임권택과 함께 80년대 대표 감독들이었는데, 이두용은 70년대에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했다. 그는 지금까지 50여편 가량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피막(1980)><최후의 증인(1980)><욕망의 늪(1982)><물레야 물레야(1983)><장남(1984)><뽕(1985)> 등이다. 이중 <물레야 물레야>는 그의 가장 중요한 대표작으로 이조시대 유교적 신분 계급사회의 제도와 관습하에서의 여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거의 금욕적일 만큼 높은 의식성의 미학을 보이게한 영화 스타일의 확립이다. 이 영화는 엄격하게 억제된 모든 화면과 결백하리만치 정서가 억제된 영상의 쌓아 올림을 통해서 아름답고도 슬픈 한 여인의 비극을 의식화했다. 이 영화는 1984년 깐느영화제에 참가해서 ‘어떤 시선’부문의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이 밖에 이두용은 현대의 한국 가정에 있어서의 장남의 역할과 가족구조의 의미를 다룬 <장남>과 일제 식민시대에 있어서의 삶의 고통을 성적 해학으로 묘사한 <뽕>을 만들었다.
이장호는 80년대 한국영화에 가장 정력적인 영화활동을 했는데, 그는 영화의 흥행면에서도 방대한 관객동원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문제작이나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는 면에서 또하나의 작가적인 개성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이장호의 작품으로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어둠의 자식들><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바보들의 행진><과부춤(1983)><어우동(1985)> 등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지적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그가 만든 작품들이 심각한 주제나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인데, 흔히 예술작품은 관객이 적고 흥행작품엔 예술성이 빈곤하다는 영화계의 통념을 이장호는 보기 좋게 깨뜨렸다. 이러한 예술성과 대중성의 동조를 보게 하는 그의 주요작품들의 주인공은 거의 현실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들을 취급한 감독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장호는 이러한 인간들을 다양한 영화미학을 통해 호소력 강하게 그리고 있다.

3. 에로티시즘류의 멜로드라마

80년대 만들어진 한국 영화 중 뚜렷한 기세를 회복한 것은 멜로드라마이다. 70년대에 만들어진 애정물이나 통속물은 전체 제작편수의 약 40% 정도였는데 반해 80년대의 비율은 15%상승한 55%이다. 이로서 긴장되고 정서가 메마른 시대에는 멜러 드라마가 감소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80년대의 멜로드라마의 회복은 그런 의미에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의 완화를 대변하며 내용 부분에 있어서는 짙은 에로티시즘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 1981년 박봉호의 <자유부인>과 김성수의 <색깔있는 여자> 그리고 이두용의 <욕망의 늪(1983)>, 이장호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가 있다. 이러한 영화는 대개 기혼 여성들의 사생활을 다루었다. 청춘영화와 10대 청소년영화는 김응천과 문여송이 집념을 가지고 만들어 왔다. 특히 김응천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살려는 청춘군상을 그려 왔으며 긍정적인 삶의 의지를 사랑, 우정, 노동 등을 통해 긴장하게 그려내면서 뮤지컬 영화로의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갈채><깨소금과 옥돌매>(1982-83)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문여송도 <사랑만들기><연인들>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1983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배창호는 <철인들><적도의 꽃><고래 사냥><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84)와 <고래 사냥2><황진이><기쁜 우리 젊은 날>(1985-87) 등을 만들며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4. 사극 영화의 새 경향 및 80년대의 신인 감독들

80년대의 영화제작 경향의 하나로 사극 영화의 부활을 가져다주는 의미는 크다. 1970년대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한 후 실상 제작비가 많이 드는 역사극은 영화제작에서 거의 그 자취가 사라지고 대신 안방 극장의 단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역사극은 새로운 모습으로 영화 제작에로 복귀되었다. 5-60년대 사극이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야사나 고전 소설을 각색한 사극 멜러 드라마와 궁중 비사, 권력간의 싸움을 그린 궁중 사극 이었던데 반해 80년대의 사극 영화는 이것과는 훨씬 다른 의미의 작품으로 역사 속에서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며 그것을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이두용의 <피막(1981)><물레야 물레야> 등 다수의 작품들이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면서 보다 더 서민적, 민중적 입장을 취했고 임권택의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이장호의 <어우동(1985)>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사극에서처럼 왕후나 권신 또는 역사 속의 유명한 위인이 아니라 비천한 서민들이며 이들은 제도와 관습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이다. 서민 사극으로 되살아난 이같은 역사에 대한 영화감독들의 태도에는 영화미학에 관한 관심과 함께 6-70년대 이후 폐쇄되어온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이장호의 <어우동>은 사극영화로는 최대의 흥행적 성과를 거두어 사극제작의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영화계는 또한 신인 감독들에게 보다 많은 등장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러한 신인 감독들 중에서 비교적 주목해야할 사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배창호는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꿈> 등 활발한 활동으로 자신의 영화스타일을 확립하였고 하명중은 <땡볕><태>(1982-85)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이 중 <땡볕>은 1985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어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영화적인 감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장길수는 <밤의 열기 속으로(1985)><레테의 연가(1987)> 를 만들었고 정지영은 <거리의 악사(1987)><위기의 여자(1987)> 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신승수는 1985년 <장사의 꿈>과 1987년 <달빛 사냥꾼>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뇌를 유연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박철수는 <어미(1985)><안개기둥(1986)> 등 현대사회의 모순과 가정생활의 위기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었다. 대개 80년대 신인 감독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그려내었는데, 어느 면에서 이들은 선배들이 제시하고 있는 심각한 주제나 소재, 그리고 원숙함이나 실험성 등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90년대 한국영화의 또다른 창조적 기여를 위해 최선의 노력 속에 있었다.

'기독영화아카데미 > 한국영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영화사 1990년대 (1990~)  (0) 2014.07.04

한국영화사 1990년대 (1990~)


1. 개요

1990년대의 중요한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1998년 50년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이다. 감시와 통제의 지난 7-80년대 상황 속에서 이런 역사적 사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던가.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연례없는 호황을 누릴 수가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한 대기업의 영화업 진출은 지난 80년대 말 UIP 직배 파문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한국 영화계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시장의 호황과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소프트웨어의 필요성이 절실해 졌고 대기업들은 다량의 소프트웨어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단관 경영의 극장가가 복합 상영 시스템으로 대형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대기업 자본 유입의 영향이 크다. 신인 감독의 대거 등장 또한 90년대의 중요한 특징인데, 대기업에 종속된 자본에 의해 상업적 논리에 입각한 감독 데뷔가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입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장르적 상상력에 대한 경도는 두 가지로 원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한국영화의 산업추세이며 다른 하나는 전 세대와는 달리 영화적 세례를 충분히 받고 영화 연출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세대의 출연이다. 이때부터 허구의 구경거리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끽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스타일에 대한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반면 잡종 장르에 나타난 빈약한 상상력 또한 나아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산업이 정체되어 있던 까닭에 산업체계와 필연적으로 맞물리게 되어있는 장르적 표현 관습이 취약했던 한국 영화는 비로소 장르의 규칙과 긴장을 이루는 관습을 축적시킬 기미를 보인다.
또한 90년대는 영화가 문화로서 확실하게 정착되는 지점이기도 했는데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제의 개최 또한 영상문화의 폭을 넓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는 서울 중심의 집중을 해소하기위해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인한 문화의 분산화 덕택이다. 1996년 개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중심의 예술영화를 선보이며 영화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의 사고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98년에는 3회를 맞이하게 된다. 1997년에 개막된 부천 판타스틱 국제 영화제 역시 오락영화만의 축제를 표방하며 세계 각국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 외에도 서울 국제 독립 영화제, 여성 영화제, 인권영화제 등 특징적 주제의 영화제가 속속 개막되어 알찬 영화 문화의 시간을 경험케 하였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IMF 경제한파로 인해 다시금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어 영화제작 환경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로 인하여 다수의 기업들이 영화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한국 영화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지는 의문 부호로 남겨둘 수 밖에 없다.

2. 중견감독들의 활약

먼저 임권택 감독은 <개벽(1991)>으로 90년대를 시작한다. 1993년 작인 <서편제>는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인 한(恨)을 임권택만의 깊이와 무게로 표현해 낸 판소리 영화로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이후 <태백산맥(1994)><축제(1996)><창(1997)>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활동과 성과로 거장의 입지를 굳힌다. 한편 박철수 감독은 <301 302 (1995)><학생부군신위(1996)><산부인과(1997)> 등의 작품으로 저예산 영화의 길을 모색하는데,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던 소재와 한달을 넘지않는 짧은 제작기간 등 그의 새로운 영화 제작방식은 자금력이 미비한 한국영화에 새로운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80년대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등의 감독들은 제각기 자신 나름대로으 색깔을 완성하며 꾸준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1990)><하얀전쟁(1992)>등 정치적인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흥행 실패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블랙잭(1997)>이라는 미스테리 멜로물에 도전해 흥행을 노렸지만 여전히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박광수 감독은 70년대 노동운동가의 삶을 그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로 '1990년대 최고의 성과'라는 찬사를 받으며 작품성과 흥행 모두 성공하지만 현재 잠시 활동을 접어둔 상태다. 장선우 감독의 행적은 90년대 한국영화계의 화제인데, <경마장 가는 길(1992)>로 그 불씨를 던지더니 포르노그라피를 표방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라는 영화로 지식인 사회의 허위를 풍자하는 야한 농담을 시작한다. 1996년에는 <꽃잎>으로 80년대 광주항쟁을 강간당하는 어린 소녀로 묘사하여 그의 여성관에 관한 수많은 억측과 인간성을 시험당했으며 1997년에는 <나쁜 영화>라는 의도적으로 형식을 파괴한 삐딱한 10대들의 삶을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에서 그려내 또한번 화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실험적 활동은 한국 영화사적으로도 흔치 않는 일이다.
또한 오랜 만에 작품을 선보인 중견감독들도 눈에 띄었는데, 이장호 감독은 <천재선언(1995)>을 만들어 사회 풍자와 은유의 예리함을 표현했고, 유현목 감독은 <말미잘(1995)>을, 정진우 감독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5)>, 배창호 감독은 <러브스토리(1996)>를 만들었으나 모두들 전작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평가를 받아 예전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는데 역부족인 듯했다.

3. 90년대의 신인 감독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상업적 한국 영화의 모델을 제시한다. 기획-시나리오-연출- 후반작업-홍보 등에 걸친 영화의 전과정에서 뛰어난 팀워크를 보여 준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입하는 전기를 마련 한국 영화의 다양화에 앞장서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대기업의 자본 유입으로 인한 90년대 신인 감독의 데뷔는 러쉬를 이루는데, 그 중 몇몇의 감독들은 계속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반면 단 한 번의 연출로 영화계를 떠난 감독들도 많다.
80년대 데뷔한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1994)>의 성공으로 블랙 코미디 장르의 개척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사업가로 성공하는데, <마누라 죽이기><미스터 맘마><투캅스2> 등으로 계속적인 흥행을 이룬다. 흥행성 위주의 감독 이외에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신인 감독들도 많았는데, 이명세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개그맨(1989)> 으로 흥행으로서는 불행한 데뷔를 한 그였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첫사랑(1993)><남자는 괴로워(1995)> 등의 작품으로 자신의 독특한 영화 미학을 구축해냈는데, 만화적인 세트 공간에서 벌어지는 그의 모든 이야기는 신선하였고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 낸다.
여균동은 <세상 밖으로(1994)>라는 무정부주의적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코메디로 흥행과 비평면에서 모두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맨?(1995)><죽이는 이야기(1997)>등 자의식이 강한 영화들로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장미빛 인생(1994)>으로 평단의 이목을 집중하며 등장한 김홍준은 8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사회 속에 그늘진 이들의 이야기들을 하고있는 지식인 감독으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많은 글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인물인데, 최근 <정글스토리(1996)>라는 록 영화를 만든 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의 1인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게임의 법칙> <본투킬>의 장현수, <그대안의 블루> <네온 속에 노을지다>의 이현승, <손톱> <올가미>의 김성홍, <절대사랑> <피아노맨>의 유상욱,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 <개같은 날의 오후> <인샬라>의 이민용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신인 감독들이 있으며 한국 영화계를 풍성하게하는 밑거름이다.

4. 독립영화의 붐

1990년대에는 충무로와 대기업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제작형태를 달리하는 독립영화.단편영화들이 각광을 받았는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는 기록 영화로서는 최초로 극장개봉을 한 작품이다. 특히 <낮은 목소리>는 일제 치하에서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아픈 기억에 대한 진술과 현재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1997년 <낮은 목소리2>도 개봉된다. 박재호 연출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은 6.25전쟁으로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문제를 그리면서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어온 동성애를 사회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묘사 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역시 독특한 시각을 가진 초현실주의적인 예술적 작품으로 그의 감독 이력을 빛나게 했다. 신인 감독의 영화 치고는 이례적으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1996)>은 복잡한 의미를 지닌 영화인데 홍상수의 차기작을 기대해 봄직하며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 임순례의 데뷔작 <세 친구(1996)>역시 섬세한 연출력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5. 의문부호 속의 한국영화

한국 영화는 오랫동안 대중과의 교감 통로를 잃어버린 상태로 있었다.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는 방송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문화적 영향력 면에서는 아무도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변화하는 내적, 외적 상황의 조건에 밀려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기운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빠른 속도로 대중 문화의 중심에 편입된 한국의 영화 문화는 그러나 산업과 장르의 미묘한 관계를 정비하기에는 아직 겨를이 없어 보인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형태로나마 지금의 제작 체계는 자본의 견제가 훨씬 심해지는 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IMF 경제 한파와 대기업의 영화업 포기 등 현재 한국 영화계의 자금력이 난국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의 영화제작은 사치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진공 상태를 뚫고 나가지 못할 경우 한국영화가 설 수 있는 입지는 산업면에서나 문화면에서나 장기적으로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의 막바지에 다달아 있는 한국 영화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저항을 얼마나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느냐에 따라 최종의 성과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1. 한국 영화 발달사 (유현목) - 책누리

2. 한국 영화의 이해 (이중거 외) - 예니

3. 한국의 영상문학 (민병기 외) - 문예마당

4. 어떤 영화를 옹호할 것인가 (강한섭) - 부키

5. 한국 영화 읽기의 즐거움 (김지석) - 책과 몽상

'기독영화아카데미 > 한국영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영화사 1980년대 (1980~1989)  (0) 2014.07.04